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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복잡한 역사가 남아있는 창경궁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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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역사가 남아있는 창경궁 관람기




안녕하세요!


오늘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창경궁에 다녀왔습니다.


창경궁은 처음 지어질 때 세종이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란 이름이었고


나중에 이 수강궁 터에 세조의 맏아들 효심 가득한 성종이


할머니, 어머니, 작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으로 이름짓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동물원과 식물원을 짓고 구조를 마음대로 바꾸면서 이름을 '창경원'이라 바꾸고


자신들을 대표하는 벚꽃나무를 잔뜩 심어 벚꽃놀이하는 곳으로 이용하는 등 왕을 무시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벚꽃나무를 베어내고 오랫동안 복원공사를 해서 다시 '창경궁'의 이름을 얻었으나


일제의 횡포 때문에 옛날 모습의 20%밖에 남지 않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한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오랜만에 찾아간 창경궁은 원래 입장료 1,000원을 받는데


문화가 있는 날이라 무료로 입장했습니다.


'문화가 있는 날'은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전국 주요 국 · 공립 박물관, 미술관, 고궁 등을


할인 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제도 입니다.


저는 주로 영화할인을 많이 이용하는 편입니다.



자세한 창경궁 입장료 안내입니다.





옥천교와 명전문의 모습입니다.


궁궐 뒤쪽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물길을 낸 걸 '금천'이라고 부르는데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고 부르고 이 옥천 위에 놓인 저 다리가 바로 '옥천교'입니다.


다리가 넓은 이유는 왕의 좌우를 보좌하는 의장대 행렬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해요!


입장하는 곳이구나 하고 그냥 건너지 마시고 다리 아래쪽 아치구조 사이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새겨진 도깨비의 얼굴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명정전의 모습입니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왕이 업무를 보았던 '문정전', 독서를 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살인마 잭더리퍼는 5명, 미국의 유명한 살인마 테드번디도 30여명을 죽였는데


사도세자는 옷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가장 아끼던 시중을 칼로 베고 맨주먹으로 패서 죽이는 등 100여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다 제 부모까지 죽이려해 결국 어머니인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나라를 위해 아들 사도세자를 죽여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버리는데 뒤주에 갇혀서도


신하들에게 먹을 걸 가져오라고 시킨다던지 탈출을 계획하며 반성의 기미 조차 보이지 않자


결국 영조는 아들을 가둔 뒤주 뚜껑에 직접 못을 박습니다.


바로 문정전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으로 후에 알려지길 영조는 세자를 잊지 못하여


'이선'이라는 세자의 이름을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의 '사도'로 바꾼거라고 하네요.



춘당지의 모습입니다.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넓은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이었다가


왕이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권농장'이라는 논으로 만들었는데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파헤쳐 큰 연못으로 만들었다가


이후 우리나라에서 복원공사로 다시 전통양식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 지금 보이는 춘당지입니다.



도심에서 볼 수 있는 연못치고는 꽤 크기가 크고


천연기념물 원앙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못 주변으로 산책로가 펼쳐져 있어 어르신들이 운동을 하시고 계셨고


벤치가 있어서 앉아서 쉬거나 책을 읽기 좋아보입니다.



춘당지 근처에서 볼 수 있는 팔각칠층석탑입니다.


이 탑은 성종때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을 지을때


상인으로 부터 구입하여 세운것이라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메..메이드 인 차이나...ㅇㅅㅇ


중국석탑임에도 보존하고 있는 이유는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한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중국 석탑이라


석탑사 연구의 자료가 되기 때문이라네요.





(설명 읽느라 사진 찍는 걸 깜박해서 퍼온 사진으로 대체)


돌아다니다 보면 성종의 '태실비'라는 것도 보실 수 있는데 거북이가 비석을 얹고 있는 모양입니다.


'태실'이라는 건 태반을 뜻하며 '태호'라는 항아리에 태반을 담아 모시는 것으로 위의 사진처럼 모십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 각지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를


전시의 목적으로 창경궁에 가져다가 놔둔거라고 하네요.


ㅂㄷㅂㄷ..

 


대온실입니다.


창경궁의 대온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입니다.


건축의 뼈대는 목재와 철재로 이루어져 있고 유리로 덮여있습니다.


근대건축의 새로운 유형인 철과 유리가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건축된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붕 위의 용마루에 장식되어있는 저 꽃은 '오얏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두꽃인데요.


궁에서 오얏꽃 문양을 자주 볼 수 있는 이유는 조선의 왕들이 모두 이씨(오얏나무 이)이기 때문입니다.


벚꽃과 비슷해서 일본인들이 벚꽃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있는데요.


독립문이나 화폐에 그려진 오얏꽃이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다는 증거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저 꽃은 오얏꽃이 맞습니다.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헤이그특사를 보냈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강제로 퇴위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 순종이 즉위되고 일본인들은 순종을 창덕궁에 집어넣습니다.(유폐)


그리고 궁을 허물고 동물원, 식물원 등을 만들고 일반인에게 개방합니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지었지만 결국 그 목적은 궁궐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짓이었죠.


그 식물원이 바로 이 대온실입니다.



하지만 건축된지 이미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 자체가 역사적 가치와 건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대온실은 문화유산으로서 남아있습니다.


현재 대온실은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야생화, 자생식물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창경궁의 유명한 소철입니다.


과거 창경원 시절부터 있던 소철인데 창경궁 복원 사업을 하며 쫓겨났었습니다.


길게 쭉 뻗어 자라는 식물이 이사를 하며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이리저리 휜 채로 돌아왔다고 하네요.


32년이나 걸려 집으로 돌아온 셈이죠.





중앙 연못에는 이집트인들이 종이를 만들때 썼다는 파피루스와 다양한 수생식물을 볼 수 있고


온실 안에는 각종 열대식물과 동백나무, 천연기념물, 분재 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으로는 그냥 부분부분 보여드려서 잘 모르시겠지만 창경궁은 엄청 넓은 부지입니다.


걷다 보면 나무가 많아서 산림욕을 하러왔나 싶을 정도입니다.


다행히도 내부에 음료 자판기와 쓰레기통이 있어 편리하게 이용했습니다.


근데..규모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창덕궁이 훨씬 더 큰 느낌입니다..


더운날 가지마세요..



지나다니시다 보면 앙부일구(해시계)도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진짜는 아니고 모사품입니다.


오목한 안쪽 바닥에 7개의 세로줄이 '시각선'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이 시각선에 비치면서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13개의 가로줄은 24절기를 나타내며


제일 바깥쪽 줄은 겨울철을 나타내고 제일 안쪽 줄은 여름철을 나타냅니다.





풍기대입니다.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측기구로 앙부일구 바로 옆에 있습니다.



저 멀리 서울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남산타워의 모습도 보이네요~


좌측으로는 순조가 태어난 '집복헌'과 사도세자와 정조, 순조가​ 지내던 생활공간 '영춘헌'이 있고


우측으로는 순조가 직접 쓴 현판이 걸려있는 '양화당'이 있습니다.


이 두 건물 사이에 계단으로 내려가시면 '자경전 터'가 남아있고


'통명전', '경춘전', '환경전', '함인정'을 볼 수 있습니다.



풍기대에서 양화당 쪽으로 길을 쭉 따라 올라가시면


여기서부터 '창덕궁'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입장료는 따로 받고 있고 창경궁보다 넓고 볼거리가 많기 때문에


조만간 따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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